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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지혁해량] 주의보

by 하랑백업 2025. 11. 18.

* 1집밥

 

 

[지혁해량] 주의보

 

 

더럽게 손 많이 가는 귀찮은 녀석일 거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숨는데 재주가 있다는 건 지겨울 정도로 잘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굴 필요가 있었을까. 그리 생각하던 신해량은 턱에 주고 있던 힘을 조금 뺐다. 자신의 의문에 서지혁이 무어라 대꾸했을지는 뻔했다. 그렇게까지 굴게 만들지 않느냐느니 하면서 또 어쩌고저쩌고, 뭐라 종알거리겠지. 그리고 그렇게 종알거리게 만들기까지는 꽤 복잡한 과정이 필요할 것이고.

일할 때마다 목숨값을 재는 직업이었으니 더 이상 일하지 않아도 돈은 충분했을 것이고, 혹서든 혹한이든 가리지 않고 몇십 시간을 대기하곤 했으니 콘크리트와 시멘트로 청결한 환경에서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을 터. 제 입으로 순천 물개니 뭐니 했으니 복잡하게 꼬인 물길 사이로 방치된 땅 한둘쯤 알아도 이상할 건 없었고 인맥 중심으로 돌아가는 시골에서 제 족적을 외지인에게 밝히지 말아 달라는 부탁도 어색할 게 없었겠다. 가장 중요한 건 소형 전자기기를 유지할 만큼의 전기였을 텐데 이마저도 대용량 충전기가 해결해 주니 문제 될 것 하나 없었다.

그래도, 잠수하지 않으면 입구를 찾을 수 없는 섬은 조금 너무한 것 아닌가. 해저동굴 입구를 발견했을 때 신해량은 터지는 헛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소설도 아니고 정말로 이런 곳이 존재했단 말인가. 하늘 아니면 해저로만 접근할 수 있는 섬이라.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무너지기 딱 좋은 섬이지 않은가. 기어이 이런 곳을 찾아서 숨어들었다는 거지. 얼굴에 잘 드러나지 않을 뿐, 약이 바짝 오를 대로 오른 신해량은 속으로 이를 득득 갈며 앞으로 나아갔다. 적당히 숨어야 적당히 찾다 멈춰줄 마음이 날 수도 있지 않겠나. 이건 이미 자신의 신체능력에 대한 자존심이 통째로 걸린 숨바꼭질이었다.

동굴은 그리 길지 않았고, 머지않아 뭍으로 연결되는 부분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신해량은 실린더며 레귤레이터 따위를 움직이지 않게 잘 고정해 정리해 두었다. 트랩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트랩 따위 도망갈 시간만 조금 벌어줄뿐더러 이런 고립된 지역은 시간 조금 번다고 어디 다시 숨거나 멀리 도망가기도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본인이 수시로 드나들어야 하는 길에 트랩을 설치하면 불편하기 짝이 없지 않겠나.

신해량은 느긋하게 주위를 관찰하며 동굴 밖으로 향했다. 밖에서 보기엔 나무가 빽빽한 것 같았지만 안쪽은 아주 딴판이었다. 아주 저만의 별장을 만들어놨군. 남아도는 게 시간이라 이거지. 서지혁이 섬 안에 제 세상을 만들어 두는 동안 신해량은 온갖 개고생을 하며 그의 흔적을 추적해야 했다. 성가시고 귀찮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사실은, 굳이 그를 찾지 않아도 뭐라 탓할 사람은 없었다. 백애영은 오히려 말리지 않았던가, 그 자식은 원래 그런 놈이었던 거예요, 잊어버리죠, 하면서. 그런 말로 정리가 되는 관계였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 텐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신해량과 서지혁의 사이는 뭐랄까, 포커게임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평온한 낯으로 어제와 전혀 다르지 않은 관계인 척하며 속으로는 온갖 경우의 수를 재고 치열하게 행동을 고민하는 게임. 신해량보다는 주로 서지혁이 치열했던 것 같지만, 어쨌든 신해량은 그 게임에서 이겨버리지도, 판을 뜨지도 않고 어울려주고 있었다. 그래, 어울려주고 있었다. 서지혁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도망친 모양이었지만.

수면제는 싫었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그 감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얕은 잠을 잘 수 없다는 건 싫다는 걸 넘어 치명적인 문제점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오는지 총이 들어오는지도 모르는 상태에 홀로 남겨진다니 위험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서지혁이 처음 수면제를 쓴 다음 날 아침, 신해량은 그저 인상을 쓰며 적당히 하라고만 일러두었을 뿐 딱히 크게 화를 내거나 하지 않았다. 여전히 몽롱해지는 감각은 싫었지만 불면증은 사고의 저하를 가져오기도 하니 조치가 필요하기도 했고, 자신이 취약한 상태일 때에 혼자가 아니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기묘한 관행이 시시때때로 벌어졌던 것 같다. 잠을 못 자서 신경이 면도날처럼 날카로워질 즈음, 서지혁이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방에 초대하면 자신은 그 초대를 받아들이고, 대접해 주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면 그다음은 아침이었다. 초대 주기는 비정기적이었는데, 서지혁은 신해량이 수면제에 특히 거부감이 강할 때를 가늠하는 듯했다. 반면 신해량은 서지혁의 무언가를 가늠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휴식의 유혹에 넘어가고 싶을 때 부러 신경을 날카롭게 갈아내며 서지혁이 제 상태를 얼른 알아차리기를 바랐다.

흐려지는 정신 사이로 느껴지는 감촉이 무엇인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알아챈 척을 하지는 않았다. 그야,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 무언가를 알아차렸답시고 티를 내는 것은 매너가 아니지 않은가.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어련히 그쪽에서 먼저 말을 꺼낼 것이고, 혹여나 영원히 밝히고 싶지 않은 거라면 그것을 같이 묻어 두어줄 용의도 충분히 있었다. 신해량에게 있어 서지혁이라는 인물은 그 정도의 배려를 해 줄 정도는 되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건 배려가 아닌 동조였고 허용이었다. 세상의 어느 누가 수면제를 먹이고 희롱하는 사람을 믿고 잠이나 자고 있나. 그건 서지혁이 잠든 제게 무슨 짓을 해도 눈감아주겠다는 선언이었다. 또한 언젠가는 서지혁이 제게 속내를 보여줄 것이라는 신해량의 자신감이기도 했다. 단지 자신이 먼저 티를 내면 꽁지 빠져라 도망갈 것 같아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잠에 빠지기 직전에 다시 눈 좀 떴다고 그렇게까지 재빠르게 자취를 감출 일인가. 애초에 신해량은 자신이 이성애자라고는 단 한 번도 말한 적 없었다.

근처에서 퍽, 하고 무언가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장작이라도 패는 모양이었다. 연기 따위 신경 쓰지 않는 과감한 행보가 돋보이는 짓이었다. 자신이 헬기를 동원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쓰고 나서 처치하기 곤란하다는 이유로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방향을 틀어 뒤쪽으로 다가가자 도끼질을 하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못 본 새에 서지혁은 근육이 조금 빠졌고 살이 좀 탄 듯했다. 조금씩 보이는 옆얼굴에서는 기껏 저만의 별장을 만든 사람답지 않게 무겁고 우울한 기색이 묻어나왔다. 신해량은 저 표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우울에서 헤어 나올 생각도 없는 사람만이 짓는, 자신도 한때는 지었을 표정. 혹시 너에게는 모른척하지 않는 게 정답이었을까? 한때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오랜 후에야 깨닫는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게 잘못이었다면, 지금까지 그를 찾는데 퍼부은 자신의 돈과 시간으로 갈음해도 충분할 것이다. 그래, 더럽게 손 많이 가는 귀찮은 녀석일 거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신해량은 서지혁이 일을 마치고 뒤를 돌아볼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장작을 다 패고, 도끼를 내려놓고, 땀을 닦고 주변을 둘러보던 서지혁의 눈길이 자신을 스쳐 지나가고, 그 스친 눈길이 다시 저를 향하고, 눈이 크게 뜨이며 얼굴이 희게 질리는 것까지 본 신해량이 입을 열었다. 먼저 아는 척을 하는 게 정답이었다면 얼마든지 맞추어주지.

잊고 있었나 본데 지혁아, 너 한 번도 나한테 포커로 이겨본 적 없잖아.

오랜만이군. 얼굴 보고 이야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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