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모와타] 48일간의 광야 샘플
* 사망소재 주의
[토모와타] 48일간의 광야
D-48: 텐쇼인 에이치
사두긴 했으되 입을 길 없어 옷 방 한 구석에 처박아두던 물건이었다. 나만은 입을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옷이고, 실제로도 한 번도 입은 적 없는 옷이었다. 오래 전 사두고 오래 잊었기에 사용인이 귀띔해주지 않았으면 먼저 백화점부터 들러야 했을 것이다. 그것도 1층이 아닌 5층, 그것도 별관.
마침 오랜만에 본가에 계시던 부모님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셨다. 아들에게 절대 입히지 않던 류의 옷이었고, 아들이 절대 입지 않던 옷이었다. 이제 자랄 대로 자라 차근차근 가문의 일을 위임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고 생각했을 터이기에 내 기괴한 옷 선택은 더욱 놀랄 일이었을 터였다. 게다가 지금은 한참 서류를 검토하는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빤히 날 보시다가 일단은 꾸짖는 목소리를 내었는데, 아버지의 말이 반 토막도 나오기 전에 어머니가 아버지의 말을 잘라내셨다. 그러고도 입을 달싹이기를 몇 번, 어머니의 눈 뒤로 많은 생각이 지나가는 것을 이제는 읽을 수 있었다.
내게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는데, 네게 먼저 간 것이니.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어머니, 전대 텐쇼인은 어머니밖에 남지 않았었지요.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어머니께 갈 기별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잠시 의아해하는 눈치였고, 아버지는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리고 입을 다물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텐쇼인 가문의 금기를 깨지 않으려 두 분 다 애쓰시는 걸 보고 나는 입술 안쪽을 깨물어야만 했다. 저는 금기와 가까운 걸 넘어서서, 아예 금기덩어리였지요. 몇 십 년을 금기덩어리와 함께 사셨으면서 이제와 새삼 왜 그리 말을 아끼시는지.
내게 수많은 인맥이 있다 한들 부모님의 손아래에서 벗어나지는 않을 터였다. 내 인맥이라 해봤자 부모님들 사이에도 면식이 있는 경우가 구 할이 훌쩍 넘었다. 그렇기에 이런 차림새로 나설 일이 있다면 부모님에게도 연락이 닿았어야 했다. 두 분이 아는 대로라면.
나는 한 마디로 간단하게 해명했다. 나 자체가 금기덩어리이므로, 부모님이 피하는 그 단어를 나는 너무나도 쉽게 말할 수 있다.
부고의 대상은 친우의 배우자였습니다.
부모님의 반응을 살피지 않고 나는 등을 돌렸다. 더 이상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무수히 많은 위험을 밟아온 후계자였고, 무례할 권리가 있었다. 이제야 기억이 났다. 어릴 때의 나는 이 옷을 입을 일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동시에 그 죄책감에 몸을 떨었다. 이제는 그저 죄책감만 남아서 나는 볼 안쪽을 송곳니로 갈아대었다. 그대로 집을 나와 현금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기사에게 방향을 지시한 뒤에야 나는 얼굴을 감싸 쥘 수 있었다. 평생 겪을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불안이 몸을 덮었다.
나는 히비키 와타루를 위해 싸구려 정장을 입었지만, 그렇다 해서 마시로 토모야를 위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먼 과거에 내가 놓쳐버린 가능성이었고 가까운 과거에는 친우의 행복이었다. 마시로 토모야가 히비키 와타루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해도 부고가 왔을 때 내 이름으로 조의금을 신경 써서 보낼 정도의 인물은 되었다. 그리고 마시로 토모야는 그뿐만이 아니라, 와타루의, 짝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이런 옷이 어울렸다. 장례식은 산자를 위한 것이었으므로. 슬픔을 극도로 나타내기 위한 허름한 옷차림을, 죽은 자 뿐만이 아닌 산 자를 위해서.
나는 더 이상 황제도 회장도 그 옛날의 텐쇼인 에이치도 아니었으나, 히비키 와타루는 지금까지도 히비키 와타루였다. 마시로 토모야 또한 만나본 때까지는 확실히 마시로 토모야였다. 그 사실에 어린 내가 마시로 토모야를 얼마나 질투했는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그를 처음에 지상에 발붙인 건 나였는데, 나조차 버겁게 그를 잡아당겼는데, 눈에 띄지도 않던 마시로 무엇이라고 하는 미천한 것이 나조차 버겁던 것을 너무나도 쉽게 해버렸다. 그게 나는 미칠 듯이 질투가 났다. 어린 나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욕심이 많았다. 그랬기에 질투로 가득 찬 머리로 마시로 토모야에게 가할 가장 험한 생각까지 해보았다고 이제야 감히 고백한다. 그러나 내 추악한 욕심은 너무 큰 나머지 오히려 와타루가 나를 싫어하는 것도 용서할 수 없었기에 마시로 토모야는 무사히 내 추악한 욕심을 피할 수 있었다. 후에 욕심을 하나씩 놓기 시작한 후에는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들은 그들로 살아갔다.
그래서 나는 내 몸에 맞지 않는 투박하고 거친 옷을 입고 기사를 닦달해 차를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 질투한 주제에, 나는 언젠가부터 마시로 토모야가 없는 세상의 히비키 와타루를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상상할 수 없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허무해서 자책감이 들었다. 이렇게 멍청했었나, 텐쇼인 에이치, 에이치, 빌어먹게 멍청한 텐쇼인.
상가가 되었을 그들의 집은 어떤 꼴일까. 상가에서 상주가 쫓겨나는 일도 있을까. 혹시 상주가 모두를 내쫓은 건 아닐까. 아니, 상주로 인정은 받았을까. 마시로가 사람들에게 침을 맞고 짓밟힐 짓이라도 했을지 모른다. 아니, 애초에 기중 팻말이 제대로 붙은 것은 맞을까. 제대로 진행했을 테니 연락이 왔을 터였지만 그 꼴이 멀쩡한 상가일지는 알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와타루에게는 친척이랄 게 없었다.
손이 덜덜 떨려서 나는 기도하듯이 두 손을 꼭 마주 쥐었다. 상가에는 마시로 가문 전체와 히비키 와타루 한 명이 있을 터였다. 마시로라는 성을 가진 온갖 사람들과, 히비키라는 성을 가진 단 한 명. 친우라면서 정작 일 년에 몇 번 보는 주제에 큰 소리 칠 것은 못 되었으나 그에게 있을 사람은 나를 포함해도 한줌이었다. 그나마 내가, 그가 휘두를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였다.
그러나 막상 그의 집에 도착한 내 눈에 펼쳐진 건, 상가였다. 그냥 상가 말이다. 세상 어딜 가든 판에 박은 듯이 똑같을 광경의 평범한 상중인 집.
그럴 리가 없는데.
“…와타루.”
“에이치.”
연락을 하고 안내받아 들어서자마자 바로 보인 와타루는, 정말로 ‘보통’ 상주의 꼴을 하고 있었다. 가라앉아있지만 그래도 제정신인 눈으로 살짝 입만 웃어 보이는 와타루의 표정이, 너무 평범해서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와줘서 고마워요, 에이치.”
그럴 리가, 없는데.
물론 평범하지 않은 것이 하나는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어깨 위를 스치는 은색 단발머리. 그 길이로는 한줄기 꼬아 내리는 것은 할 수 있어도 둥글게 말아 올리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그저 한줄기 꼰 타래만 남아있었다. 머리 길이가 훅 줄어들었기에 인상도 변했지만, 그래도 그는 히비키 와타루였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아니라. 마시로 토모야의 장례식장에서. 그는.
머리카락 덕분에 할 말을 찾기는 쉬웠다.
“머리카락, 잘랐네.”
그는 처연하게 다시 웃어보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었을, 그리고 그 웃음에 다들 멋대로 이해하고 넘어갔을 미소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내가 눈에 힘을 주었지만 그는 고집을 부리듯 웃어보였다. 나는 먼저 가족들에게 예를 표하고, 손을 들고 고인에게 예를 먼저 차렸다. 망자를 제쳐놓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가 아니었다.
영정 안의 마시로 토모야는 밝게 웃고 있었다. 영정사진을 준비했을 리가 없으니 급히 아무 사진에서 가져와서 걸어놓은 것이겠지. 사고사라고 들었다. 아직 사고사나 자살이 가장 많은 사망원인인 나이였다. 그 나이대에 어울리는 웃음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내렸다.
내 부모님은 죽음을 생각나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부했고, 나는 반발하듯이 모든 사진을 영정사진에 그럴듯한 표정으로 찍었다. 그러나 영정사진은 부모에게 반항하기 위한 물건이 아니라는 게 오늘에서야 가슴에 와 닿았다. 영정사진의 망자가 밝게 웃고 있는 것만큼 산자를 서럽게 하는 것도 없었다.
망자에게 인사하고 그의 부모와 와타루에게 다시 인사하니 부모가 토모야를 보시겠어요, 하고 권한다. 단순한 권유였겠으나 내게는 압박 같은 것이었다. 상중인 부모가 아니라 텐쇼인의 이름과 와타루의 체면이 권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보고 싶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무섭지는 않았다. 그저 이질감에 어지러울 뿐이었다. 마시로 토모야는 더 이상 마시로 토모야가 아닌 채 수의가 아닌 양장을 하고 누워있었다. 평소에 좋아하던 옷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예를 표하고 다시 천을 덮었다. 모든 과정이 간소하긴 하나 제대로 된 절차를 밟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나를 위해 와타루는 자리를 옮겼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이야기를 하라고 마시로가에서도 방을 내준 터였다. 손님들이 군데군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의외로 평범한 장례식이라는 말에 와타루는 웃으면서, 토모야군의 장례식이니 토모야군이 좋아할 법한 식으로 해보았다고 답했다. 아, 그럴법했다. 와타루는 꿋꿋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모든 걸 휘두르고 다니면서도 마시로 토모야가 정말로 싫어할 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 그에게 다 맞춰주었다. 무려 그 히비키 와타루가. 그러니 장례식 또한 망자가 원하는 대로 맞춰줄 법도 했다. 실제로 고인의 얼굴을 보았을 때 망자가 입은 것도 수의가 아니었으니까.
하고, 나는 하마터면 그대로 넘어갈 뻔했다.
마시로 토모야는 히비키 와타루의 머리카락을 좋아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정말 좋아할 법한 식으로만 했다면 와타루가 머리카락을 자를 리가 없었다. 그것도 아무렇게나 잘라서 삐뚤빼뚤한 모양으로 둘 리가 없었다. 나는 대화를 잇는 대신 와타루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나는 머릿속을 이 잡듯 뒤졌다. 무엇 때문에. 슬픔에 대한 표현으로 머리카락을 자르는 이야기는 어느 나라에나 있다. 그러나 하필 히비키 와타루가 왜.
와타루는 긴장한 표정으로 내내 나를 보았다. 내가 추측할 수 없을 거라 믿는다면 저런 표정도 짓지 않았겠지. 가짜 얼굴을 지어낼 여유도 없다는 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아.
와타루가 날 말리기도 전에 나는 휘적휘적 망자에게로 향했다. 약간 예의에 어긋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와타루가 쫓아오면서 내 이름을 불렀으나 나는 와타루를 무시했다. 그리고 대단히 정중하게 마시로 토모야의 부모에게 다시 한 번 그를 보고 싶다고 했다. 같은 학교에서 함께 공연한 적도 있으니 각별하다고 덧붙이자 부모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관을 열어 흰 천을 걷었다. 뒤에서 소리 없는 탄식이 똑똑히 들렸다. 나는 확인했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와타루를 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그는 나를 졸졸 따라왔다. 나는 그대로 사람이 드문 방으로 향했고, 구석에 자리잡고 나서야 나는 몸을 돌려 와타루를 대했다.
그래, 히비키 와타루가 이리도 순순할 리가 없었지.
나는 알 수 있었다. 눈길이 망연히 그를 향했다. 알 수 있었다. 나는 언제나 죽음과 밀고 당기며 춤을 추던 사이였으므로 쉽게 알 수 있었다. 아주 작은 사실 몇 개만으로도. 언제나 죽음에 관련한 모든 것에 금지 당했기에 오히려 언제나 죽음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느꼈던 나였기에, 이토록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그도 알아차렸다. 그는 포기한 얼굴을 하더니 과장된 몸짓으로 내게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아아, 와타루, 너는 내게 왜 이런 잔인한 짓을 하는 거야. 어째서, 나는, 지금까지도 꾸역꾸역 살아있는 내게. 나는 그에 대해 훤히 알았지만 그 때도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나를 영원한 죄책감의 구렁텅이로 빠트리려는 거야. 지금껏 육신이 주는 고통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버겁게 살아왔는데. 내 친구라 하는 네가, 어째서.
그러나, 그리 말하는 대신 나는 네게 버릇처럼 하던 말을 했다. 아마도 이 순간, 사랑을 먹어치우는 광대인 네가 바라고 있을 단 한마디를.
“정말, 너는 언제나 날 놀라게 하는구나.”
와타루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 잔인하기 짝이 없는 광대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