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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섬툴루 외전 후일담: 강수민, 신의 아이

by 하랑백업 2023. 11. 4.

*섬툴루 전체 시나리오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열람시 주의 바랍니다.

* Sting의 Shape of my heart를 들으며 작업했습니다.

 

 

 

 

 

 

강수민은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릴 때 지겹도록 보던 것과 전혀 다른 지평선 위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땅에서도 하늘과 지상을 한일자로 가를 수 있다는 것은 본격적으로 해외로 나가고 나서야 알았다. 사랑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는 마른 땅 위의 곧은 일직선.

건기는 모든 것이 말라비틀어지는 시기다. 식물도, 강도, 사람도, 물자도. 습기 없는 여름이 견디기 더 쉽다고 누가 말했던가. 한국의 여름이 찌는더위라면 이곳의 더위는 타는더위다. 고통의 결이 다를 뿐 견디기 힘든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가만히 있어도 고통스러운 날씨에도 인간은 서로 죽고 죽이기를 반복했다. 역겨운 일이었다.

외과전문의라서 그런지 처음인데도 이런 상황을 잘 견디시는 군요. 저는 처음에 아주 고역이었습니다. 지금도 고역인 건 마찬가지고요.’

한 간호사가 그렇게 불평했을 때 강수민은 그저 옅게 웃기만 했다. 아니, 외과의라고 한들 인간이 처참하게 찢겨지는 광경을 쉽게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의사라면 누구나 응급실 경험이 있고, 응급실 경험이 있으면 끔찍한 광경도 보게 되지만, 의사라고 해도 인간의 악의로 만들어진 참극에 익숙하지는 않다. 이건 외과의가 아니라 강수민이기에 견디기 수월한 거였다.

오지 않는 물자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강수민은 묵묵히 저가 치료할 수 있는 환자를 치료했다. 한 번 파견을 다녀올 때마다 현실감이 없었다. 한국에서는, 심지어 마태도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이 여기서는 목을 빼고 기다려도 올까 말까였다. 사람들은 다양하게도 죽었는데, 상당수는 한국에서는 약값으로 몇 천원만 쓰면 되는 간단한 질병으로 죽었다. 가까운 약국으로 달려가 카드를 내밀면 먹을 수 있는 약인데, 가져올 수만 있다면 다 살 수 있는데. 본부에서 약을 보내주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다양한 이유로 중간에 사라질 뿐이다.

환자들은 고분고분했다. 여기저기 고통으로 신음하면서도 고개를 저으면 고개를 떨어뜨리고 마는 이들이었다. 이들도 아는 것이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저 파란 눈의 의사가 약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것을.

수민은 한 번 더 병동을 둘러본 다음 의료진 구역으로 돌아갔다. 더 있어보았자 기대와 절망을 반복하는 표정 말고는 볼 수 있는 게 없었다. 약은 오늘 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지금 시간까지 밖이 떠들썩하지 않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이럴 때 담배를 피우면 속이 좀 트였을까? 한 번도 담배를 입에 댄 적 없는 수민은 가끔씩 경험하지도 못한 흡연욕구가 치솟았다. 물론, 지금 담배가 있다면 강수민의 입이 아니라 죽어가는 환자의 입으로 들어갈 것이다.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 치들의 마지막 기쁨으로 타오르는 것이다.

강수민은 값비싼 담배를 얻어 피면서도 삶을 갈망하는 자들을 수없이 보았다. 방법이 없는 환자에 대한 우대라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어가며 죽어가는 사람들. 강수민은 그 서글픈 열망을 보았지만 울지 않았다. 누군가가 말했다. 처음 현장을 보고도 울지 않는 사람은 굉장히 오랜만이라고. 그래서 처음엔 여기까지 파견된 의사라는 게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혹시 냉혈한이 아닌가 생각했다고.

아니, 강수민은 냉혈한이 아니었다. 감정이 메마르지도 않았다. 강수민에게 그런 광경이 처음이 아닐 뿐이었다. 오히려 마음의 거리는 그 때보다 멀었다. 어쨌든 지금 죽어가는 사람들이 강수민과 오래 알던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그는 보았다. 서로 인사하고 웃고 함께 일상을 보내던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그 죽음까지도 삶에 대한 열망에 바쳐지는 것을.

강수민에 대한 오해는 그가 조용하게 정신과 상담 신청을 했을 즈음에야 풀렸다. 늘 덤덤하고 평온한 인상으로 불면증부터 시작하는 온갖 병명을 나열하는 모습이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고 한다. 표정에 전혀 드러나지 않아 몰랐다고, 미안하다고 하는 말에 강수민은 조금 웃으며 괜찮다고 답해주었다. 어쩐지 겉도는 느낌이더라니, 그런 오해를 받을 줄이야.

그 이후로 친해진 간호사와 의사 서너명이 다가와 말을 걸고 물을 건넸다. 마음으로는 다들 그게 물이 아니라 술이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그래, 이런 날은 술이 필요했다. 처음에 구석에서 오열한 간호사도,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강수민도. 술이 있을 리가 없는 환경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술 대신 종교에 매달렸다. 종교가 없는 이는 별로 없었다. 무교인이 여기 와서 종교인이 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이들만 해도 각자의 종교적 의례를 치르고 오는 길이었다. 종교가 있지도, 종교가 없어도 아무런 시간도 가지지 않는 강수민은 굉장히 특이한 사례였다. 보통은 종교가 없으면 저 무자비한 지평선에 대고 묵념이라도 하는데 말이다.

선생님께선 종교가 없으신 데도 꾸준히 오시네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인의 기준에서는 굉장히 열린 태도이고 칭찬이었다.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봉사활동에 오지 않는다고 곡해하기 충분한 말이었지만, 수민은 굳이 그렇게까지 해석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의 말은 전쟁 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마음의 안식처가 될 만한 곳을 찾지 않는다는 뜻에 더 가까울 터였다.

수민은 그 말에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 대충 얼버무리거나 그냥 웃어넘기거나 했을 것이다. 제대로 된 대답을 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데다, 말한다 한들 믿어주지도 않을 테니까. 그저 가볍게 대단치도 않습니다, 하고 흘려보내며 다른 주제를 꺼내는 게 옳았다. 기부 이야기로 넘어가면 또 쉴 새 없이 이야기가 나왔다. 누군가가 거액 기부 이야기를 하며 친구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 수민은 더 밝게 웃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들은 모두 틀렸다. 수민은 무교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그가 믿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을 따름이었다. 수민은 믿는 게 아니라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믿는 선하고 자비로운 신의 존재여부는 몰라도, 무자비하고 소름끼치며 광기어린 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수민은, 그 신에게서 인간을 구하는 건 오직 인간뿐임을 믿었다. 지옥은 신도 인간도 만들 수 있지만, 그 지옥에서 인간을 건져내는 건 같은 인간만이 할 수 있었다. 생의 열망에 사람을 바치는 대신 제 생의 열망을 죽이는 것. 그것이 수민이 믿는 종교의 가르침이자 지향점이었다.

친구들이 파견 나갈 때마다 걱정하는 건 알고 있었다. 그 걱정에 답해주지 못해 언제나 미안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수민은 자신이 기억하는 최초의 그 순간부터 신의 아이였으며 진정한 신의 아이가 되려면 먼저 인간의 아이여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수민은 수많은 걱정을 뿌리치고 험지로 향하는 것이다. 자신이 믿는, 가장 신성한 인간의 아이가 되기 위해서. 그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 죽는다면 타인을 위해서. 그렇게 정해졌으므로 수민은 울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친구를 향한 칭찬을 들으며 수민은 기분 좋게 물을 한 모금 삼켰다. 미지근하고 텁텁한 물이 목울대를 넘어갔다. 오늘은 얼마나 더 인간에 가까워졌을까. 인간의 아이가, 그리고 진정한 신의 아이가 된다면, 그렇게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을 칭찬해줄까? 굳이 지금처럼 열심히 하지 않아도 그는 기꺼이 칭찬해주겠지만……. 그저 이것은 강수민 본인의 욕심일 뿐이다. 제가 믿는 인간에게 가까워지고 싶다는 신성한 욕심.

대화가 끝나갈 무렵 수민은 일어나 환자들에게로 갔다. 그렇게 매번, 어둠에 파묻혀가는 것이다. 지옥이 더 이상 지옥이 되지 않도록, 마치 향로를 들고 어둠에 파묻히던 그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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